이동 삭제 역사 ACL 마이클 조던/생애 (r2 문단 편집) [오류!] 편집기 RAW 편집 미리보기 굵게기울임취소선링크파일각주틀 == 고등학교와 데뷔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600><table bordercolor=#87ceeb><#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edia.zenfs.com/jordan_mm_large.jpg|width=100%]]}}} || ||<#87ceeb><:> {{{#ffffff '''NCAA우승을 확정짓는 위닝샷을 날린 UNC신입생 마이클 조던'''[* [[https://youtu.be/dudyYrAb4HY|참고로 조던은 이 때를 현재까지의 인생에서 지금의 자신을 만든 가장 중요한 순간이였다고 회상했다.]]][* 조던은 대학 진학때까지 프로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스스로 인터뷰에서 "고향에선 늘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에 가서 벤치에 4년동안 앉아있다가 돌아와서 주유소에서 일하거나 할거라고 생각했죠."라고 말할 정도. 다만 이 건 본인이 약간 과장한 것으로 후술되다기시피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 최고의 유망주이자 전국구 유망주였고 [[https://basketball.realgm.com/highschool/awards-by-season/1981|전미의 유망주들이 뽑히는 올아메리칸 퍼스트 팀에도 뽑혔다]] 당시 전미에서 미스터 바스켓볼 (MVP)로 뽑힌 선수는 훗날 절친이 되는 [[패트릭 유잉]]. 여담이지만 이때 올아메리칸 팀에 뽑힌 고교 동기 중에는 훗날 불스 동료가 되는 샘 빈센트 (퍼스트 팀), 그리고 2차 3연패 팀의 백업 센터였던 빌 웨닝턴 (서드 팀)도 있었다.] }}} || 그는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이 되어 1군팀(Varsity)에 뽑히기를 기대했으나 당시 178cm의 그리 뛰어나지 않은 선수였던 조던은 1군 선수 선발에서 탈락했고, 프레드 린치 코치는 201cm의 키를 가진 동급생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를 주전선수로 발탁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첫번째로 그는 농구에 그리 집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당시 3개의 스포츠 (야구/농구/풋볼)을 동시에 할 정도로 농구는 취미로만 여겼었다. 물론 대부분의 특급선수들은 여러 스포츠를 동시에 하지만 다수의 스포츠에서 동시에 정상급인 선수는 별로 없다. (풋볼과 농구에서 동시에 주 챔피언에 오른 [[앨런 아이버슨]] 정도) 그런데 조던이 가장 좋아하고 열심히 한 스포츠는 아버지 제임스도 좋아했던 야구였고, 당시 조던은 투수이자 중견수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만 12세 당시 유소년 야구 리그인 Dixie Youth League의 Mr.Baseball(MVP)로 뽑혔다. 물론 유소년 리그긴 하지만 노스캐롤라이나 주 전체의 MVP기 때문에 무시못할 성과다. 그의 운동신경과 센스, 근성을 생각하면 야구선수로 갔어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이유는 [[https://www.interbasket.net/news/19696/2016/05/michael-jordans-high-school-stats-and-accomplishments/|당시 고등학교 농구부에는 무려 11명의 4학년과 3명의 3학년]]이 있었다. 더 노련한 상급생들이 많은데 실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고 키도 작은 조던을 굳이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 게다가 이들 중 8명이 가드였기에 저학년 가드인 조던은 더더욱 필요없었다. 마지막,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위에도 언급된 키였다. 레이니 고등학교는 당시엔 그리 잘 나가는 학교가 아니었고, 장신도 거의 없었다. 스미스는 201cm로 98년 시카고 트리뷴 기사에 따르면 1군팀에서 가장 큰 선수들보다도 족히 4인치(10cm)는 더 컸다고 한다.[* 당시 그를 탈락시킨 프레드 린치 코치는 (후술되는 헤링 감독과 다른 사람. 당시 클리프턴 헤링(1952~2019) 감독은 1군, 린치는 1군을 맡았고, 2학년 중 2군으로 올려보낼 선수를 결정한 건 바로 린치였다.) 저학년들 중에서는 조던이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고 여러번 밝혔으나, 어차피 고학년들이 팀의 주축인 상황에서 조던이 고학년들을 압도하는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리로이 스미스 정도 사이즈면 고등학교 레벨에선 상당히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키만으로도 뽑을 만하긴 하다. 린치가 어느 정도 미화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가 탈락 사건 이후 2년도 안되어 전미 최고의 유망주 중 하나가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급성장과 노력을 감안해도 2학년 당시 조던은 2군에서 돋보이는 선수였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조던 집안은 173인 형 래리 조던이 덩크 슛을 자유자재로 하고 조던의 아들들도 실력과 별개로 운동능력 하나는 발군일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집안이다.] 이 사건 이후 조던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당한 좌절감과 질투심에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라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이후 바로 풋볼을 그만두고 야구도 1년만 더 하다 그만두면서 농구에 올인한다. 뒤에 서술되는 급격한 실력 향상은 이 덕분. 여담이지만 조던은 농구에 올인하기 시작한 이후 2군(Junior Varsity) 소속이면서 1군 연습까지 뛰었으며, 1군에 올라간 이후에도 1군/2군 연습에 전부 참가할 정도로 독하게 연습했다고 한다.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으로 넘어가는 여름 (미국은 가을에 학기가 시작한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데 조던이 무려 6인치(약 15cm)나 자란 것이다. 193cm의 장신이 되고 피나는 훈련으로 뛰어난 실력자가 된 조던은 바로 1군에 합류, 첫 경기에서 35점을 포함해 3학년 시즌동안 25.4점 12리바운드 5.3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된다. 이어 4학년 시즌에 무려 26.8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평균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레이니 고등학교를 노스캐롤라이나 주 랭킹 1위로 이끌지만, 주 챔피언십 파이널에서 아쉽게 뉴 하노버 고등학교에 56대 52로 패하고 만다. 이후 조던은 4학년의 신분으로 1981년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게임[* 전미의 훌륭한 고등학교 선수들을 초청해 서부/동부 형식으로 치르는 올스타전. 1977년에 초대 경기가 치러졌다.]에서 무려 30점을 올리는데, 이 기록은 1999년 MVP 조나단 벤더가 31점으로 깨기 전까지 18년동안 남아있었다. 이 경기에서 야투 19개 중 13개를 성공시킨 조던은 경기 종료 11초를 앞두고 자유투 두개를 성공시키며 동부가 96대 95로 승리하게 되는 결승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6개의 스틸과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이와 같이 괴물같은 활약을 했음에도 그는 [[http://www.maxpreps.com/news/G8mGlzK-Ed-UswAcxJTdpg/a-look-back-at-mcdonalds-all-america-game-over-the-years.htm|MVP를 수상하지 못했는데]], 당시 MVP는 24점을 기록한 당시 198cm 슈팅 가드 애드리언 브랜치와 19점을 올린 193cm 오브리 쉐로드에게 갔다고 한다. 당시 야투율이 탁월하게 높지도 않고, 득점 외 공헌도가 높지도 않았던 둘이 조던을 제친 것은 아직도 이해못할 결정으로 꼽힌다. 쉐로드는 이후 고향에 있는 위치타 주립대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입학하기 전 해에 8강까지 가던 팀은 하필 이때 몰락해 3학년까지 NCAA 토너먼트 진출도 못하다가 1985년 겨우 진출, 1라운드 탈락에 그친다. 브랜치의 경우 상황이 훨씬 나아서 농구명문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해 2, 3, 4학년 때 토너먼트를 경험해 16강까지 간다. 이후 의도치 않게 조던이 둘에게 복수(?)하게 되는데, 비교적 평범한 유망주인 둘은 1985년에 '''시카고 불스'''에 쉐로드는 2라운드 34번, 브랜치는 46번으로 뽑히게 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불스엔 방금 역대급 루키 시즌을 치르고 난 조던이 이들과 같은 슈팅 가드 포지션에 버티고 있었다. 프리 시즌에 눈에 띌 만한 활약을 못 보인 두 선수는 둘 다 시즌 시작 전에 잘리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조던은 개막 이후 3경기만에 부상으로 장기 결장을 했기 때문에 개막 후 일주일 정도만 더 버텼으면 후보로서 출장시간을 얻을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방출 이후 쉐로드는 하부리그인 CBA에서 뛰다가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1986년 계약했지만 마찬가지로 개막 전 방출, 하부리그와 호주 리그 등에서 뛰다가 단 한 경기도 NBA에서 뛰지 못하고 농구 커리어를 마무리했고, 2016년에 모교인 위치타 주립대 농구부의 [[https://www.kwch.com/content/sports/Aubrey-Sherrod-to-serve-as-TV-analyst--408360805.html|특별 해설위원도 맡았다]]. 브랜치의 경우 다행히 1986-87 시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합류해 32경기를 벤치에서 뛰며 4.3점 1.7리바운드를 기록, 놀랍게도 플레이오프 로스터에 합류해 11경기동안 1.3점을 넣으며 우승반지를 챙긴다. 그는 통산 네 시즌동안 총 130경기(주전출장 7경기)에 뛰고 CBA, 호주 NBL 등 여러 리그를 전전하다 1995년 이스라엘 구단 하포엘 라맛 간 기바타이임 BC를 끝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한 후, 한동안 스포츠 선교에 전념하다 2004년 샬럿 밥캣츠 중계 해설위원으로 전직하여 2007년부터 ESPN 대학농구 중계 해설위원을 맡고 있다. 유망주로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던 조던은 결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들어간다.[*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pel Hill. UNC, 채플힐 또는 운동부 마스코트인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타힐스(Tar Heels)]]라고 한다.] 참고로 고교 시절 조던을 탈락시킨 린치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는 심심찮게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내가 탈락시킨 것은 지금의 조던이 아니었다.. 특히 키가.." 를 시작으로 왜 탈락을 시켰는지에 대해 변명해야 했다. 참고로 리로이 스미스는 UNC 샬럿 캠퍼스 진학 후 전국구로 두각을 못 드러내 NBA에선 뛰지 못했지만 1985~1990년까지 영국, 일본 등지에서 프로 농구선수로서 여러 리그에서 뛰었다. 다만 프로 경력자체는 그리 길지 못했다. 은퇴 후 스포츠 마케팅에 전념하여 NBC유니버설 세일즈&마케팅부사장, HLS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등을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당시 조던은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고등학교 선수가 되어 UNC를 포함한 여러 일류대학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고교선수 랭킹은 Parade지에서 선정하는 올아메리칸 팀이 있었는데(1957년부터 2015년까지 제공), 조던은 여기에서 올아메리칸(전국)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주에는 아직 고교 미스터 바스켓볼(MVP) 제도가 없었으나,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노스캐롤라이나 선수가 바로 조던이었기 때문에 만약 있었다면 선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이때 퍼레이드지 전국 최고의 고등학교 선수로 선정된 선수가 바로 평생의 라이벌이 되는 [[패트릭 유잉]]이었고, 같은 퍼스트 팀 멤버 중 훗날 시카고 불스에서 동료로 뛰게 되는 가드 샘 빈센트(미시건 주), 그리고 4th 팀에 불스 왕조 동료인 빌 웨닝턴(뉴욕 주 출신)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조던이 원래 가고 싶어했던 대학은 UNC가 아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NC스테이트 울프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NBA에서 내로라하는 덩커였던 [[데이비드 톰슨]]을 좋아하던 조던은 그의 모교인 NC스테잇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조던은 유년기에 NBA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대학농구팬이었으며, 톰슨의 대학시절 그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농구선수를 꿈꾸게 됐다. 노스캐롤라이나는 전통적으로 대학농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던 지역으로, 조던이나 당시 노스캐롤라이나 청소년 대부분은 지역 팀도 없던 NBA를 많이 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조던의 청소년 시기인 70년대 NBA는 인기 면에서 많이 떨어져, 신생리그인 ABA와도 경쟁이 잠깐 될 정도였다.] 그러나 조던에게 NC스테잇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 조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딘 스미스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한 덕에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조던의 입학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는 당시 조던이 사인한 입학 서류를 대학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로 마이클 조던이 졸업 후 몇년 뒤인 1988년에 모교 체육관을 찾아서 농구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순찰 중이던 체육관 직원이 조던이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쫓아냈다. 신입생이던[* 여담이지만 신입생 때 인터뷰나 우승 후 팬들 앞에서 조던이 말할 때 목소리를 들어보면 10대라 어려서 그런지 의외로 하이톤에 경박한 목소리인데다 남부지방 특유의 사투리가 묻어난다. (다만 노스캐롤라이나가 지역적으로 아주 남쪽 지방은 아니라 심하진 않다)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 선언 기자회견 당시에는 현재 팬들이 알고 있는 중후한 목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오는데, 성장이 끝나며 목소리가 변한 것으로 보인다.] 1982년 그는 [[패트릭 유잉]]이 뛰고 있던 조지타운 대학을 상대로 한 [[NCAA]] 파이널에서 결승 점프 슛을 터트려 일거에 전국구급 스타가 되었다. 이 당시에 함께 우승을 일궈낸 팀동료&선배들 중엔 대표적으로 [[제임스 워디]]가 있다. 파이널 후 1982 드래프트에 참가해 1순위로 뽑히게 되는 워디는 전국 최고의 대학선수 중 하나였다. (다만 그와 동기 중 최고는 4학년 시즌까지 다니고 다음 해에 프로에 진출하는 랄프 샘슨이었다) 당연히 팀의 에이스였고, 당시 팀의 2인자는 조던보다 1년 선배였던 2학년 [[샘 퍼킨스]]였다.(훗날 1984 드래프트에서 조던 바로 다음 순위로 댈러스에 뽑힘) 당연히 조지타운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워디를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그 다음으론 퍼킨스를 어느 정도 견제하고 있었다.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조던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감독이었던 딘 스미스는 이를 노리고 워디를 중심으로 한 플레이를 짜면서 그에게 "자네가 공을 잡으면 공을 돌리게. 그러면 마이클에게 찬스가 날 걸세"라고 지시하고 마이클에겐 "자네에게 찬스가 나면 바로 쏘게"라고 지시했다. 즉, 전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를 제치고 이제 갓 19세가 된 1학년 애송이에게 결승 슛을 맡긴 것. 이 때문에 조던에게 오픈 찬스가 났고, 그가 이를 주저하지 않고 쏨으로서 역전할 수 있었다. 물론 오픈샷이라곤 하나 당시 기준 농구 역사상 최다 관중 앞에서 넣으면 천국, 놓치면 지옥인 상황에서 주저않고 쏴서 넣은 건 어마어마한 강심장이 맞다. 보통 그런 상황에선 경험 많은 상급생들도 긴장할텐데, 1학년 애송이가 에이스를 제치고 바로 쏴버린 것. 괜히 조지타운 수비수들이 이 게임에서 워디에 이어 타힐스에서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하고 있던 그를 내버려둔게 아니다. 설마 쏘겠냐한 것. 그 다음 해에는 올해의 대학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때의 추억이 가슴 깊이 남았는지, 그는 프로진출 후에도 저지 밑에 UNC시절 입었던 [[스패츠]]를 같이 입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럼 한 벌을 해질 때까지 입는거냐'고 생각하는데(실제로 '스페이스 잼'에 출연했을 때 벅스 바니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때 입었던 스패츠를 계속 입은 건 아니고 프로 데뷔 후 스스로 부진하다고 느꼈을 때 학교에 가서 왕창 구매해서 계속 돌려 입었다고. 조던이 가진 몇 안되는 징크스중 하나. UNC museum의 조던 관의 비디오를 보면 조던이 "I've always worn UNC shorts, I can't go anywhere whithout having them on, No matter how successful I become, you know, it all started at UNC"라고 말하는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1984년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참가, 3순위로 [[시카고 불스]]의 지명을 받아 시카고 불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table align=center><table width=600><table bordercolor=#d4001f><#ffffff>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oy from north carolina.gif|width=100%]]}}} || ||<#d4001f><:> {{{#ffffff '''"저는 시카고 불스가 레이커스나, 세븐티식서스나, 보스턴 셀틱스처럼 존중받는 프랜차이즈가 되길 원합니다.. 다행히 제가.. 이 팀이.. 이 조직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고 봐요.."'''[* 드래프트 되고 난 후의 인터뷰이다. 그리고 훗날 이 청년은 두 번의 쓰리핏을 이룬 불스 왕조를 만든다.] }}} || 그해 마이클 조던은 신인왕과 올-NBA 세컨드 팀에 뽑혔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농구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때 1위는 [[휴스턴 로키츠]]가 지명한 [[센터(농구)|센터]] [[하킴 올라주원]] 이었고, 2위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지명한 샘 보위라는 [[농구/포지션|센터]]였다. 당시 포틀랜드는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레전드 [[슈팅 가드]]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김거김|가드를 지명할 생각이 없었던]] 포틀랜드의 지명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법 했으나, 그 후 샘 보위가 부상으로 몇 해 뛰지 못하고 은퇴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역사에 손꼽히는 바보같은 결정 순위에서 항상 1순위로 꼽히고는 한다. 일명 Sam bowie Picks. ~~그리고 포틀랜드는 23년 후 [[케빈 듀란트|비슷한 짓]]을 [[그렉 오든|또 한다]].~~ 참고로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미국]] 농구 국가대표 감독이었던 인디애나 대학의 바비 나이트 감독이 포틀랜드 프론트에게 조던을 추천했는데 우리는 [[센터(농구)|센터]]를 뽑을꺼라고 하니깐 "조던을 [[센터(농구)|센터]]로 쓰면 된다"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던과 드렉슬러가 커리어 동안 보여주었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두 선수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드렉슬러는 큰 키로 인해 SG라기 보다는 SF에 더 가까운 선수였고 두 선수 모두 득점은 물론이고 리딩, 리바운드, 수비까지 수준급 이상이었던 선수고 (물론 수비같은 경우 차이가 많이 난다) 조던은 1988-89 시즌엔 [[포인트 가드]]로 출장하며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두 선수의 엄청난 실력과 겹치는 스타일을 생각하면 동시에 기용하는게 낭비기 때문에, 만약 이때 조던이 뽑혔다면 훗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코비 브라이언트 케이스처럼 드렉슬러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바보같이 조던 트레이드하고선 나중에 후회하거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드웨인 웨이드]]와 [[르브론 제임스]]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둘 다 득점과 리딩이 가능한 스타일이라 히트 시절 르브론이 좀 더 볼을 많이 쥐고 플레이하면서 공존했고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였으나, 둘 다 온볼플레이어 성향이 강했던 지라 아무래도 시너지가 약간 떨어지긴 했다. 조던과 드렉슬러가 뛴다면 더 득점력이 뛰어난 조던이 주득점원으로 활용될 확률이 높지만 조던은 웨이드만큼 온볼성향이 강한 선수는 아니기에 좀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물론 그래도 두 에이스가 함께 뛰는건 낭비고, 당시는 슈퍼스타들이 여럿씩 뭉치는 시기가 아니었기에 공존은 힘들었을것. 슈퍼스타들이 한 팀에 여럿 있는 경우 압둘자바-매직처럼 세대교체의 형태로 이뤄지거나 매직-워디나 버드-멕헤일의 케이스처럼 에이스와 조력자로 우열이 명확한 경우. 참고로 매직과 압둘자바의 경우 매직의 루키 시즌 리그 MVP였던 압둘자바와 우열이 명확했고, 매직의 실력이 역전할 때쯤 압둘자바는 이미 30대 중반으로 노화로 인한 실력 저하인데다 그의 전성기 실력 자체와 업적은 누구라도 인정할 정도로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이상적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난 경우. im preview 요약 문서 편집을 저장함으로써, 사용자는 본인이 기여한 콘텐츠가 CC BY-NC-SA 2.0 KR에 따라 배포되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저작자 표시를 하이퍼링크나 URL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또한, 이 동의는 기여한 콘텐츠가 저장되고 배포된 이후에는 철회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이해하고 동의합니다. 비로그인 상태로 편집합니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로 문서 편집을 저장하면, 편집 역사에 본인이 사용하는 IP(18.118.210.6) 주소 전체가 영구히 기록됩니다. 저장